"6월항쟁이 6·29 이끌었다는 데 이견 불가": 연합뉴스(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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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이 6·29 이끌었다는 데 이견 불가": 연합뉴스(06.07)

구도희 3,693 2017.06.08 10:52
 
 
1987년 6월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6월항쟁을 평가절하하는 이론도 상당수 제기됐다.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연 심포지엄 '6월항쟁, 촛불혁명, 한국 민주주의: 30년의 넘나듦과 나아감'에서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낸 원인이 6월 항쟁임을 재확인하는 등 학자들의 연구성과가 발표됐다.
 
학자들은 6월항쟁은 '항쟁'이고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촛불집회는 '혁명'이라는 평가도 내놓았다.
 
 
◇ "6·29 선언이 6월항쟁 결과임에는 이견 있을 수 없어"
 
'호헌철폐' 등을 구호로 내건 6월 항쟁은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6·29 선언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과 미국이 상당부분 역할을 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를 하더라도 자신들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보고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5공화국 헌법과 6·29선언' 제하 발제를 통해 "30주년을 맞는 올해는 기존의 6월항쟁 연구를 더 거시적이고 입체적인 시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점"이라며 "6·29 선언의 주도권에 대한 사후 해석에서 보수 주도론이나 미국 역할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6·29 선언이 6월 항쟁의 결과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정 교수는 다만 개헌과 대통령 선거를 치른 결과 '항복한 지배블록의 후보'가 대통령이 당선됐기 때문에 6·29 선언을 둘러싼 사후적인 해석이 덧붙여지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4·13 호헌조치 이후 정권이 6·29 선언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역시 6월항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 전두환 정권은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할 수 없었던 상황인 데다 광주민주화운동의 경험으로 군대를 동원하기도 어려웠던 상황이라는 것이 정 교수의 설명이다.
 
앞서 전두환 군사정권을 '승인'한 미국 역시 이 과정에서 한국 내 반미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두환 정권에 평화적 방식으로 정권을 이양하라고 회유와 압력을 가했다.
 
정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이 차선책으로 6·29 선언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제도권 야당이 6·29 선언을 받아들인 것은, 6월항쟁이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를 받아들이게 할 만큼 강력했지만 정권을 타도하기에는 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87년 체제'가 무너진 원인은 '97년 IMF 체제'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6월항쟁, 6·29 선언으로 마련된 '87년 체제' 이후 노동운동이 무너진 것은 꼭 10년 뒤 찾아오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문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권력과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노동운동의 이력이 참담하게 무너진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가"라고 자문(自問)하고는 "87년 체제의 관성에서 벗어나 97년 체제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답(自答)했다.
 
정치적 민주화, 경제성장, 노동자의 시민권 획득, 민주노조운동의 성장 등으로 대표되는 87년 체제가 10년 만에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시장 자본주의,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 변화 등으로 노동운동의 존립기반을 뒤흔든 97년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1997년부터 2009년 사이 총 23회의 총파업을 펼치는 등 파업 건수를 늘리고, 투쟁의 강도도 높였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민주노총 총파업은 중앙조직의 결정에 따라 수행된 나머지 현장의 사전 준비 없이 진행됐다"며 "결국 총파업은 노동자 대중을 참여시키지 못했고 국민 여론도 동원하지 못한 채 현장의 피로도만 높이게 됐다"고 지적했다.
 
노조 조직률은 1989년 19.8%를 정점으로 2000년에는 11.6%로 떨어지고, 2010년에는 한 자릿수인 9.7%까지 떨어졌다.
 
이 이사장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해 '민중총궐기' 집회를 주도한 혐의가 인정돼 실형을 선고받고 올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것을 현 시점 노동운동의 위상을 드러내는 한 단면으로 거론했다.
 
다만 그는 최근 들어 조합원 수가 늘고 있고 초기업단위 노조 비중도 증가했으며 '희망버스'와 같은 시민사회운동 세력의 지원이 이어졌다는 점을 변화의 조짐으로 언급하고, 앞으로 노동운동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명확히 밝히고 나서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1987년 6월은 '항쟁'…2016년 11월은 '혁명'"
 
6월항쟁을 30년 뒤의 촛불집회와 비교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박근혜 정권 퇴진을 내걸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촛불집회를 '11월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은 '항쟁'인 반면, 4·19혁명과 11월 촛불혁명은 '혁명'이라고 각기 구분했다.
 
그는 항쟁과 구분되는 혁명의 고유한 특징이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라고 강조했다.
 
5·18과 6월항쟁이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했다면, 4·19는 단순히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넘어서 한국전쟁 학살자 명예회복과 남북 평화통일운동, 민주노조운동 등 우리 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라는 것이 손 교수의 주장이다.
 
11월 촛불혁명 역시 단순히 박근혜 정권의 퇴진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저에 '고장난 대의민주주의', '헬조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촛불집회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공개발언과 주최 측인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적폐청산 요구 등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고 손 교수는 지적했다.
 
손 교수는 이와 같은 논지를 바탕으로 11월 촛불혁명이 '성공한 혁명'이라는 평가를 부정하고, 적폐 청산과 '탈(脫)헬조선'을 이뤄내야만 성공했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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