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노동공제회 4년의 경험: 확장된 노동운동의 영역
송명진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 사무국장
나름의 절박함으로 국외로 탈주한 적이 있다. 각 국가의 노조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1년짜리 석사과정이었다. 졸업논문에 필요한 주제를 찾다가 ‘디지털 플랫폼 노동’이 눈에 띄었다. 리포트 수준의 글이나마 다행히 통과된 걸로 만족하며 그걸로 끝이라 여겼다. 그런데 플랫폼 노동과의 인연은 귀환 후에 더 깊어졌다.
노동법적 보호는 뒷전, 기술혁신 논리의 득세
2017년 촛불혁명과 정권교체의 격변기를 지난 한국 사회는 4차 산업혁명 대응이라는 거대 미션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노동운동 역시 디지털전환과 플랫폼노동이라는 낯선 현상의 해석과 대응에 분주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비롯해 일자리위원회, 4차산업혁명위원회 등 각종 정부위원회에서 플랫폼 노동의 정의 규정, 실태파악, 보호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디지털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서비스에 대해 사회 전체의 후생을 증진하는 혁신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전통적인 법제보다는 자율적 규제로 혁신의 싹을 지켜야한다는 분위기였다.
2019년 공유차량 플랫폼 타다에 대한 규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디지털 플랫폼 사업’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택시업계 노사단체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적극적으로 드러내진 못했지만, 정부 관료와 전문가 상당수가 기술혁신의 편에 기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법망의 사각지대를 활용한 플랫폼기업의 규제 회피에 대해 전통산업과의 불공정 경쟁일 수 있다는 인식은 부족했다. 플랫폼노동자 보호와 관련해서는 디지털기술의 발전에 따라 유연노동의 확산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 되다시피 했다. 사회안전망을 어떻게 확충할 지가 주된 정책 관심사가 되었고,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 확대가 핵심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AB5법이 제정되어 플랫폼 노동자를 고용된 노동자로 분류하도록 하고 (이후에 권리가 대폭 제한된 법으로 대체되었지만), 스페인에서는 라이더법이 제정되어 음식배달 플랫폼 노동자를 노동자로 간주하는가 하면, 유럽연합(EU) 집행위에서 노동자 지위 추정제도를 도입하는 ‘플랫폼노동지침’이 마련되었다는 나라 바깥 소식들이 연달아 소개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실태 파악이 충분치 않고 ‘플랫폼 종사자’의 법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검토도 축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업의 반발과 부담을 고려한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 방안들이 주로 검토되었다.
물론 플랫폼 일부 직종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의무가입과 보험료의 50% 부담에 대해 기업들을 설득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보호방안의 논의에서 노동자성 인정을 통한 노동법적 보호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다. 노동자성 판단기준이 경직되어 있고, 기술혁신이라는 거대담론이 정부와 사회 전반에 규제 회피의 정당성을 확산시켰다. 이에 맞춰 혁신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는 ‘노동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목소리를 키웠다.
노동조합의 대응과 내부의 고민
노동조합운동의 대응은 어땠을까? 일괄해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노동조합 내셔널센터의 정책담당자였던 나 스스로 사고의 좌충우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술결정론적 시각을 비판하면서도 산업혁명 초기에 직조기계를 파괴했던 ‘러다이터’나 ‘붉은 깃발법’을 지지했던 마차조합에 빗대어지고 싶진 않았다. 속으론 플랫폼의 파괴적 혁신이 경제사회 곳곳의 낡은 체제에 기생해온 기득권을 깨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책임질 필요가 없는 노동력’의 활용을 사업모델로 하는 노동플랫폼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사용자 책임은 어느 정도일지,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혹여 의도치 않는 결과로 귀결되는게 아닐지 판단이 어려웠다. 그래서였을까, 노동법의 확장을 통한 보호의 강화를 정책과제로 타이핑하면서도 단단히 땅을 밟고 서있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노동공제로 방향을 잡다: 설립의 동기와 초기의 난관
한편 2019년을 전후해 플랫폼노동자 보호와 조직화를 위한 전략으로 노동공제라는 방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노조가 아닌 방식의 취약노동자 이해대변 사례들에 대한 연구나 그 즈음의 봉제인공제회 설립으로부터 자극을 받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당사자 사업을 펼쳐왔던 가사·대리운전업종 노동자협동조합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경로 형성의 필요성도 보다 뚜렷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공제조직의 목표와 성격을 정하고, 초기사업을 설계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은 실무자 입장에서 매우 고된 일이었다. 치밀한 전략보다는 외부요인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바빴다.
그럼에도 조직노동의 적지 않은 성원과 투자를 바탕으로 출범한 공제회를 안정적 단계로 진입시키는 것이 실무자로서의 지상과제였다. 한해 두해가 지나고 성과만큼이나 한계가 뚜렷이 느껴지고 답답함도 커졌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당혹감이 훅하고 닥칠 때도 있었다. 노동조합과 노동공제조직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문제를 풀어가는 관점과 방식에 차이가 보일 때 특히 그랬다.
공제회의 실무와 정책의 간극에서 오는 고민
고용보험이 한 사례일 수 있겠다. 배달·대리운전 노동자들이나 콘텐츠창작 프리랜서들의 상당수는 실제로 써먹지 못할 것 같은 실업급여를 위해 돈을 따박따박 떼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건당 수수료에서 일정비율을 적립해 실제 목돈이 필요할 때 사용하게 하자는 등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그들의 입장에선 지극히 타당할 수 있는 제안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도 고용·산재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냥 납부하고 있지 않냐는 식의 반응이 나올 때 왠지 마뜩하지 않았다. 보험료의 부담 수준이나 실제 적용가능성, 보장범위의 측면에서 제도가 공평하게 설계되어 작동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퇴직금제도가 없는 프리랜서와 플랫폼노동자의 노후보장 강화 수단으로 퇴직공제를 검토할 때 역시 공적기금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우려를 접할 때도 마음이 불편했다. 대안으로 제시하는 방안에서 아직 구체적 내용이 마련되지 않았거나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음에도 제도적 공백을 보완하려는 당사자들의 자구노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회보험 제도를 비롯한 공적 안전망의 주요 역할을 노동공제를 중심으로 재편하자는 주장이다. 고용 기반의 국가 중심 안전망에서 벗어나, 노동자 스스로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자율적·상호부조적 방식으로 보호체계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일리있는 주장과 논리일 수 있지만, 불확실성과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장치인 사회보장제도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중해야 했다.
노동공제회를 설립하며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보완적 역할을 자임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공제사업의 모델을 만들어 갈 때 제도화의 가능성과 기존 시스템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며 독자적 영역을 추구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프리랜서 포함 결정의 배경과 의미
플랫폼노동의 증가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으로 시작된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는 어느 시점부터 플랫폼을 통해 일하지 않는 전통적 의미의 프리랜서들이 전체 회원 규모에서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강사, 디자이너, 통번역가, 웹툰·웹소설 작가, 미디어영상제작자, 공연예술인 등 직종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애초 공제회의 명칭으로 플랫폼노동공제회를 구상했다가 프리랜서를 포함시킨 것은 플랫폼을 이용해 일감을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일하는 내용과 방식에 큰 차이가 없고,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일하는지의 여부로 노동공제를 통한 보호마저 차이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이 결정은 매우 타당했고 시의적절했다. 플랫폼노동자를 중심에 둔 국가의 보호정책 대상 역시 노무제공자로 빠르게 확대되었는데, 법적 포괄성이나 정책의 실효성과 형평성의 측면에서 플랫폼노동자라는 좁은 범주의 보호정책으로는 한계가 크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프리랜서에 대한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참으로 막막했다. 플랫폼노동이라는 새로운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니 프리랜서라는 광활한 바다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누가 프리랜서인지, 그들은 어떻게 일하고 어떤 고충이 있는지, 프리랜서는 노동자인지,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정리된 답은 없었고, 부딪히며 찾는 수밖에 없었다.
공제회 회원가입 자격에서부터 애매한 경우가 나타났다. 기업으로부터 고정급을 받으면서도 프리랜서로 부업 수준 이상의 일을 하거나, 개인이 제작한 상품의 전시와 판매를 겸한 작업장을 갖추고 있거나, 프리랜서 계약을 한 직원을 두고 있는 프리랜서 등 사례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프리랜서 정의의 경계와 현실적 고민
프리랜서 정의에 대한 공제회 회원 사이의 논쟁도 있었다. “‘근로자’, ‘자영업자’와 같은 종사상 지위에 따라 설계된 사회적 보호제도에서 공백지대에 있는 ‘인적용역사업소득자’만을 진성 프리랜서로 인정해야 한다.”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프리랜서는 정책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클라이언트의 회계처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세금계산서 발행을 목적으로 개인사업자를 등록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개인사업자 등록의 유무와 상관없이 권리의 부재와 보호정책의 배제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명시적 결론은 없었지만 굳이 노동하는 당사자 단체가 참여자를 특정기준을 들이대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대신 공제회 회원들의 고충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 프리랜서의 직업적·경제적 불안정과 취약성을 확인했다. 전통적인 프리랜서 직업의 이미지와 달리 업무와 노동시간의 선택과 조정, 보수액의 설정 등에서의 자율적 권한이 약하고, 불공정과 부당한 처우에 상시적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플랫폼 노동화가 진행되거나 수요독점적 기업들이 존재하는 분야에서는 상당한 종속성이 나타났다.
경제법적 보호의 한계와 노동법적 보호의 필요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인가.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은 주로 배달이나 대리운전 등 일부 업종에 한정되거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대상 확대 등 제한된 수준에서 머물고 있었다. 또한 표준계약서와 같이 경제법적인 접근과 자율규제 방식이 선호되었다. 특정 고용주와의 고정된 고용계약 없이 개별계약을 기반으로 일하며 보수를 지급받는 게 플랫폼·프리랜서 노동의 특성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계약의 공정성을 높이고 직업에서의 자격체계나 안전보건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공정거래법·하도급법·약관법 등 경제법과 산업법의 보호가 강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법은 노동관계 규율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시장 지배력이나 거래상 우월성 요건을 필요로 하는데, 그 사실을 종사자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또한 사후적 구제 중심이라 속도가 느릴 뿐더러 집단적 보호가 미흡하다. 노동법적 보호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가장 명확한 노동법적 보호방식은 고용관계 인정 추정 원칙을 도입해 오분류를 해소하고, 노동법상 노동자 범위를 확대하여 최저임금·근로시간·연차휴가·산재보상·부당해고구제 등 법적 권리를 전면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위장 프리랜서 계약을 근절하고 플랫폼기업의 사용자 책임을 분명히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규직 중심의 보호 모델이 모든 프리랜서·플랫폼노동자에게 실효성 있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현행 노동법의 적용 범위를 대폭 확장하더라도 고용관계 바깥에서 노무제공을 하며 생계를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조정과 제도 확정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일하는 사람 권리 보장법’의 가능성과 한계
이같은 점에서 보수를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한 보편적 노동권의 보장을 목적으로 제안된 ‘일하는 사람 권리 보장법’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사람의 정의와 보호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요구되고, 사용자 정의 및 책임 소재 등이 모호해 실효성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계약방식과 노동형태가 대폭 늘어난 노동시장에서 사회적 보호의 최저기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기존 노동법상 노동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수준이 축소되거나 이중화될 위험이 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노동관계법을 우선 적용하는 유리적용 원칙을 전제하고 있어 노동권의 온전한 보장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법 자체의 효능감은 낮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보호법제의 공백지대를 메꿀 수 있는 정부의 적극적 정책과 국회에서의 추가 입법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변화를 위한 조건: 당사자 참여와 중층적 사회적 대화
노동법적 보호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뿔뿔이 흩어져 일하고 있는 플랫폼노동자와 프리랜서들의 삶이 개선되지는 않는다. 맞춤형 복지와 상호부조 활성화를 위한 정책이 강화되어야 한다. 기업의 책임이 부재한 세세한 영역에서 국가와 지자체의 보호와 지원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정책의 전달체계를 통합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과제는 산적하고 분야마다 차이도 크다.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신통방통한 묘약은 없다. 당사자 참여를 기반으로 한 중층적인 사회적 대화 구조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추진 체계의 마련이 필수다.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가 설립된 지 4년이 되어간다. 200명으로 시작한 공제회 회원수가 5000여명 수준으로 확대됐고, 4명이던 상근자도 14명으로 늘었다. 당초 기대했던 목표와 속도에 비춰보면 그동안의 성과가 흐뭇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날로 확대되고 있는 비전형 불안정 노동자들의 조직화의 계기와 기반을 제공해왔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본다. 당사자 참여에 기반해 공공정책의 현장성과 실효성을 제고하고, 전달체계를 보완하는 역할 또한 각종의 사업 경험들을 통해 강화되고 있다. 지금도 새로운 사업과 실험이 추진되고 있다. 경제와 사회의 주체들과 노동조직들의 변함없는 관심과 응원을 기대한다.
출처: 『e노동사회』 2025년 7월호